대다수 일반주주 보호하는 선진 자본시장인지, 소수 지배주주 위한 자본시장인지,
정부와 국회는 명확하고 현명한 선택 바란다
-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자본시장 정상화와 선진화의 기초 중에 기초다. 의무 부담의 주체는 미국처럼 이사가 되어도, 독일처럼 지배주주가 되어도 된다.
- 8개 경제단체는 ‘지배주주가 곧 회사’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상장으로 일반주주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한 이후 의무와 책임은 전혀 안중에 없는 것인가?
- 회사들의 협회인 경제단체는 현재의 지배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거래소와 금융 당국, 경제 부처 등 정부와 정치권의 답변은 무엇인가?
- 투자자 보호가 미흡한 한국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는 주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메커니즘이다. 아시아 기업 거버넌스 평가기관인 ACGA도 한국에서 더 많은 행동주의 활동을 주문했다.
언론에 따르면 한국경제인협회 등 8개 경제단체가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에 대한 경제계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6월 24일 정부에 공동 건의사항 (이하 “한경협 등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한경협 등 의견의 내용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회사법 체계를 훼손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위배되며, 현행법으로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경영 일선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사법 리스크 증가로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파악된다.
근거 없는 위협과 가스라이팅은 이제 접고 상식에 맞는 논리적인 토론을 하자.
우선 대단히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한경협 등 의견이 명확한 사실과 법리를 왜곡하고 또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법에 필요한 주장만 하면 되는 것인데 왜 거짓말과 가스라이팅으로 합리적인 토론장을 오염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손바닥으로 잠깐 한 사람의 눈을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난 2020년 공정경제 3법 개정 논의 당시, 모 경제지에 따르면 정만기 자동차산업연합회 회장은 ‘상법 개정안 통과는 적군이 우리 군 작전회의에 참석해 기밀을 빼가는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하고, 모 일간지는 ‘상법 개정시 30대 기업 중 29곳 이사회, 외국 투기자본에 뚫릴수도’라는 제목을 달았었다.
과연 지난 4년간 단 한 곳이라도 상장기업 이사회에서 기밀이 유출되고 외국 투기자본이 이사회 다수를 차지한 경우가 있었는가? 구태의연한 가스라이팅이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지배주주와 특수관계인이 평균 30% 넘는 지분을 갖고 있는 상장회사들이 외국 사례 왜곡과 경영권 위협, 기업가 정신 위축과 같은 가스라이팅에 다시 몰두하는 것은 볼썽사납다. 이제 쟁점 흐리기는 그만 두고 상식과 논리에 맞는 토론을 해 보자.
회사의 이익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을 해결하자는 것이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입법론이고, 이사든 지배주주든 이 문제에 책임을 지면 된다.
이사의 주주충실의무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가장 쉬운 합병의 예를 들어 보자.
A사가 B사와 합병하는데 A사의 이사가 ‘회사를 위하여’서만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면 이사는 결정 기준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합병은 주주들 간의 거래이지 회사 사이의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라는 법인의 재산을 기준으로 보면 합병 전후에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다. 합병 전후 달라지는 것은 A사와 B사 주주의 지분율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합병비율’이다.
그런데 이 때 ‘회사를 위하여’ 결정하라는 법만 있으면, 합병 비율이 1:10이 되건 10:1이 되건 이사는 할 일을 다한 것이 된다. 그러면 주주의 재산권은 누가 보호하나? 지금 우리 법과 판례에 따르면, 최선을 다해 A사 주주에게 유리한 합병 비율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없다.
바로 이럴 때 이사가 ‘전체 주주를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넣자는 것이 이사의 주주충실의무 입법론이다. 만약 A사의 주주 중 B사와 관련된 사람이 있다면 주주간 형평성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의 전형적인 예다.
대다수의 선진국은 주주간 이해충돌 문제를 회사법에서 해결하는 법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주주 충실의무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고, 거의 모든 선진국의 법에서 볼 수 있다. 8개 경제단체가 무슨 근거에서 이사의 주주충실의무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위배’라고 주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이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1) 미국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의 본고장이다. 어려운 논문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duty of loyalty to shareholders’를 검색만 해도 엄청난 분량의 기초적 내용이 쏟아진다. 판례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할 수도 없다.
(2) 우리가 선진국 제도의 표본이라고 생각하는 OECD의 “기업 거버넌스 원칙”이 자본시장 제도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다. (“Board members should act … in the best interest of the company and the shareholders …”)
(3) 일본은 경제 회복을 위한 ‘세 개의 화살’ 중 하나의 일환으로 2015년 기업 거버넌스 코드를 제정하고 이사회의 주주에 대한 수탁자 책임을 명시했다. 이것이 최근 주식 시장과 경제 회복의 기초가 된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4) 독일은 이사가 아닌 지배주주가 직접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에서의 충실의무(Treuepflicht)를 부담한다. 1988년 Linotype 판결을 찾아보자. 이후 수많은 판결과 이론이 우리나라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상장회사에도 대부분 지배주주가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지배주주가 일반주주에게 직접 충실의무를 부담하는 이러한 독일식 법리가 더 맞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와 법제가 비슷한 일본과 독일을 포함해서 선진국의 법제는 주주들 사이의 이해충돌 상황에서 이사 또는 지배주주에게 다른 주주를 보호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기본이다. 중요한 것은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이다. 이런 상황조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수많은 선진국의 법제가 도대체 무엇을 규율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한경협 등은 자꾸 ‘일상적인 회사경영과 관련하여’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하면 문제라는 식으로 이해충돌 없는 상황을 끼워 넣거나 외국 입법례를 왜곡해서 쟁점을 흐리지 말기 바란다. 주주 충실의무는 주주간 이해충돌이 없는 모험적 M&A나 일상적 경영상 결정에 적용되는 의무나 책임이 아니다.
주주간 이해충돌의 문제를 불완전한 회사법과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하려고 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취약한 기업 거버넌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첫째 원인이다.
사실 한경협 등 의견이 ‘경영 일선의 혼란 초래’라고 이름 붙인 네 번째 항목의 사례들이 바로 우리 법이 지난 2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따라서 주주 충실의무의 도입으로 해결의 첫 단추를 끼워야 할 주주간 이해충돌의 사례를 잘 보여준 것이다.
- 지난 30여년 동안 합병, 분할,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일반주주들의 지분율이나 지분 가치가 축소되고 지배주주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왔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부당한 자본거래가 계속되어도 된다는 의미인가?
- 공정거래법이 일감몰아주기 규제, 사익편취 금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열사간 거래를 규제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배주주에게 회사의 부가 이전되고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을 거의 막지 못했다. 지금처럼 누구도 알기 어려운 ‘시가’를 증명하지 못해서 공정위가 번번이 법원에서 패소하고 지배주주는 0.1% 지분을 낮춰 규제를 빠져나가는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는 의미인가?
- 회사 돈으로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있다가 특정 주주를 지지하는 제3자에게 처분 (=경영권 방어)하는 것은 주주평등의 원칙상 당연히 금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과 법원은 여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왜 경영권 방어를 주주 스스로의 돈이 아닌 회사 돈으로 해야 하는가? 지배주주가 곧 회사라는 생각 없이는 이런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규제에 실패한 법의 구멍을 막기 위한 기초로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자본시장 정상화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
주주 충실의무 도입시 회사나 이사회가 지켜야 하는 절차적, 실체적 기준과 요건은 명확하고 혼란이나 불확실성은 없다.
그리고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될 경우에도 경영의 불확실성은 전혀 없다.
미국의 예를 들면, 주주간에 이해충돌이 있는 합병 등 거래에서는 그러한 거래를 하려는 이사가 절차와 조건에 있어서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을 증명하면 된다.
또는 지배주주와 관계 있는 이사를 배제한 완전히 독립적인 이사회 산하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 거래를 진행하게 하고, 주주총회에서도 지배주주 및 특수관계인을 모두 뺀 나머지 주주들의 과반수로 결정하면 된다. 2024년 테슬라 주총에서는 논란도 많았지만 일론 머스크 CEO에게 60조원이 넘는 주식매수청구권(스톡옵션)을 지급하는 보상 안건에 대해 머스크 본인과 동생은 지분율 13%가 넘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리 어렵지도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든지 도입할 수 있는 기준이다. 현재 사업구조 개편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SK그룹의 경우 SK이노베이션과 SK E&S가 합병을 추진한다면 최태원 회장 본인과 관계 있는 이사를 배제한 완전히 독립적인 위원회를 구성해서 합병비율 등을 논의하면 되고, 주총에서도 지배주주인 SK(주) 및 특수관계인을 모두 뺀 나머지 주주들의 의견을 따르면 된다.
주주 행동주의는 주주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한 활동임은 물론 자본시장의 효율성을 제고시키는 바람직한 활동이다.
한편 헤지펀드 행동주의는 가치 중립적이다. 상법 개정이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주장은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송옥렬 교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주의는 자본시장에서 주주의 목소리를 회사에 전달하는 유력한 통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한국의 장기 총주주수익률(Total shareholder return)은 선진국 최하위 수준인 연 5%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이나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을 활용한 주주가치 개선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행동주의가 올바른 자본배치 요구를 통해 투자자 보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아시아 거버넌스 전문 평가기관인 Asian Corporate Governance Association(ACGA)도 최근 한국 보고서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더 많은 행동주의 활동을 주문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운명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은 미래 지향적 선택을 하기 바란다.
한경협 등은 더 이상 팩트를 왜곡하지 말고 정당하게 논의에 참여하기 바란다.
차라리 ‘현재의 지배주주가 가장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으니 지배주주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토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한경협 등 의견은 마치 ‘지배주주가 곧 회사’이니 다른 주주는 그저 따르라는 주장으로 들린다.
상장으로 일반주주들로부터 거액의 자본을 조달할 때는 각종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을 상장회사들일텐데, 일반주주의 이익을 더도 아니고 지배주주와 같은 정도로 공평하게 보호할 의무나 책임은 왜 부담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주주 전체에 대한 충실의무는, 모든 주주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다.
그런 원칙을 지킬 의무를 회사의 의사결정 주체인 이사에게 부담시키면 이사의 주주충실의무, 실제 이익을 누리며 이사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배주주에게 부담시키면 지배주주의 다른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되는 것 뿐이다.
한경협 등 8개 단체는 회사들의 조직이다. 회사들의 단체가 현재 지배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거래소와 금융 당국, 경제 부처 등 정부, 그리고 정치권의 답변은 무엇인가?
자본시장 정상화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사실 선택의 문제다.
지금처럼 저평가 상태에서 미국, 일본, 대만 등 다른 자본시장보다 열위에 있는 시장으로 남는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국내 기관과 개인 투자자들은 외국 자본시장에 투자하여 수익을 얻고, 한국 회사의 지배주주들은 계속 자본거래와 새롭게 나올 다양한 방법으로 일반주주들의 희생 하에 지배력을 유지, 강화하면서 원하는 방법으로 경영에 대한 영향력을 승계하면 된다.
정부와 정치권은 그런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 미래를 위한 선택인가?
2024. 6. 25.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 이남우
부회장 천준범
대다수 일반주주 보호하는 선진 자본시장인지, 소수 지배주주 위한 자본시장인지,
정부와 국회는 명확하고 현명한 선택 바란다
-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자본시장 정상화와 선진화의 기초 중에 기초다. 의무 부담의 주체는 미국처럼 이사가 되어도, 독일처럼 지배주주가 되어도 된다.
- 8개 경제단체는 ‘지배주주가 곧 회사’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상장으로 일반주주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한 이후 의무와 책임은 전혀 안중에 없는 것인가?
- 회사들의 협회인 경제단체는 현재의 지배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거래소와 금융 당국, 경제 부처 등 정부와 정치권의 답변은 무엇인가?
- 투자자 보호가 미흡한 한국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는 주주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메커니즘이다. 아시아 기업 거버넌스 평가기관인 ACGA도 한국에서 더 많은 행동주의 활동을 주문했다.
언론에 따르면 한국경제인협회 등 8개 경제단체가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에 대한 경제계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6월 24일 정부에 공동 건의사항 (이하 “한경협 등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한경협 등 의견의 내용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회사법 체계를 훼손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위배되며, 현행법으로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경영 일선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며, 사법 리스크 증가로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파악된다.
근거 없는 위협과 가스라이팅은 이제 접고 상식에 맞는 논리적인 토론을 하자.
우선 대단히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한경협 등 의견이 명확한 사실과 법리를 왜곡하고 또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법에 필요한 주장만 하면 되는 것인데 왜 거짓말과 가스라이팅으로 합리적인 토론장을 오염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다. 손바닥으로 잠깐 한 사람의 눈을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난 2020년 공정경제 3법 개정 논의 당시, 모 경제지에 따르면 정만기 자동차산업연합회 회장은 ‘상법 개정안 통과는 적군이 우리 군 작전회의에 참석해 기밀을 빼가는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하고, 모 일간지는 ‘상법 개정시 30대 기업 중 29곳 이사회, 외국 투기자본에 뚫릴수도’라는 제목을 달았었다.
과연 지난 4년간 단 한 곳이라도 상장기업 이사회에서 기밀이 유출되고 외국 투기자본이 이사회 다수를 차지한 경우가 있었는가? 구태의연한 가스라이팅이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지배주주와 특수관계인이 평균 30% 넘는 지분을 갖고 있는 상장회사들이 외국 사례 왜곡과 경영권 위협, 기업가 정신 위축과 같은 가스라이팅에 다시 몰두하는 것은 볼썽사납다. 이제 쟁점 흐리기는 그만 두고 상식과 논리에 맞는 토론을 해 보자.
회사의 이익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을 해결하자는 것이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입법론이고, 이사든 지배주주든 이 문제에 책임을 지면 된다.
이사의 주주충실의무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가장 쉬운 합병의 예를 들어 보자.
A사가 B사와 합병하는데 A사의 이사가 ‘회사를 위하여’서만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면 이사는 결정 기준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합병은 주주들 간의 거래이지 회사 사이의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라는 법인의 재산을 기준으로 보면 합병 전후에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다. 합병 전후 달라지는 것은 A사와 B사 주주의 지분율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합병비율’이다.
그런데 이 때 ‘회사를 위하여’ 결정하라는 법만 있으면, 합병 비율이 1:10이 되건 10:1이 되건 이사는 할 일을 다한 것이 된다. 그러면 주주의 재산권은 누가 보호하나? 지금 우리 법과 판례에 따르면, 최선을 다해 A사 주주에게 유리한 합병 비율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없다.
바로 이럴 때 이사가 ‘전체 주주를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넣자는 것이 이사의 주주충실의무 입법론이다. 만약 A사의 주주 중 B사와 관련된 사람이 있다면 주주간 형평성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의 전형적인 예다.
대다수의 선진국은 주주간 이해충돌 문제를 회사법에서 해결하는 법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주주 충실의무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고, 거의 모든 선진국의 법에서 볼 수 있다. 8개 경제단체가 무슨 근거에서 이사의 주주충실의무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위배’라고 주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이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1) 미국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의 본고장이다. 어려운 논문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duty of loyalty to shareholders’를 검색만 해도 엄청난 분량의 기초적 내용이 쏟아진다. 판례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할 수도 없다.
(2) 우리가 선진국 제도의 표본이라고 생각하는 OECD의 “기업 거버넌스 원칙”이 자본시장 제도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다. (“Board members should act … in the best interest of the company and the shareholders …”)
(3) 일본은 경제 회복을 위한 ‘세 개의 화살’ 중 하나의 일환으로 2015년 기업 거버넌스 코드를 제정하고 이사회의 주주에 대한 수탁자 책임을 명시했다. 이것이 최근 주식 시장과 경제 회복의 기초가 된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4) 독일은 이사가 아닌 지배주주가 직접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에서의 충실의무(Treuepflicht)를 부담한다. 1988년 Linotype 판결을 찾아보자. 이후 수많은 판결과 이론이 우리나라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상장회사에도 대부분 지배주주가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지배주주가 일반주주에게 직접 충실의무를 부담하는 이러한 독일식 법리가 더 맞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와 법제가 비슷한 일본과 독일을 포함해서 선진국의 법제는 주주들 사이의 이해충돌 상황에서 이사 또는 지배주주에게 다른 주주를 보호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기본이다. 중요한 것은 ‘주주간 이해충돌 상황’이다. 이런 상황조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수많은 선진국의 법제가 도대체 무엇을 규율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한경협 등은 자꾸 ‘일상적인 회사경영과 관련하여’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하면 문제라는 식으로 이해충돌 없는 상황을 끼워 넣거나 외국 입법례를 왜곡해서 쟁점을 흐리지 말기 바란다. 주주 충실의무는 주주간 이해충돌이 없는 모험적 M&A나 일상적 경영상 결정에 적용되는 의무나 책임이 아니다.
주주간 이해충돌의 문제를 불완전한 회사법과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하려고 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취약한 기업 거버넌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첫째 원인이다.
사실 한경협 등 의견이 ‘경영 일선의 혼란 초래’라고 이름 붙인 네 번째 항목의 사례들이 바로 우리 법이 지난 2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따라서 주주 충실의무의 도입으로 해결의 첫 단추를 끼워야 할 주주간 이해충돌의 사례를 잘 보여준 것이다.
- 지난 30여년 동안 합병, 분할,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일반주주들의 지분율이나 지분 가치가 축소되고 지배주주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왔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부당한 자본거래가 계속되어도 된다는 의미인가?
- 공정거래법이 일감몰아주기 규제, 사익편취 금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열사간 거래를 규제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배주주에게 회사의 부가 이전되고 지배력이 강화되는 것을 거의 막지 못했다. 지금처럼 누구도 알기 어려운 ‘시가’를 증명하지 못해서 공정위가 번번이 법원에서 패소하고 지배주주는 0.1% 지분을 낮춰 규제를 빠져나가는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는 의미인가?
- 회사 돈으로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있다가 특정 주주를 지지하는 제3자에게 처분 (=경영권 방어)하는 것은 주주평등의 원칙상 당연히 금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과 법원은 여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왜 경영권 방어를 주주 스스로의 돈이 아닌 회사 돈으로 해야 하는가? 지배주주가 곧 회사라는 생각 없이는 이런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규제에 실패한 법의 구멍을 막기 위한 기초로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자본시장 정상화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
주주 충실의무 도입시 회사나 이사회가 지켜야 하는 절차적, 실체적 기준과 요건은 명확하고 혼란이나 불확실성은 없다.
그리고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될 경우에도 경영의 불확실성은 전혀 없다.
미국의 예를 들면, 주주간에 이해충돌이 있는 합병 등 거래에서는 그러한 거래를 하려는 이사가 절차와 조건에 있어서 ‘완전한 공정성(entire fairness)’을 증명하면 된다.
또는 지배주주와 관계 있는 이사를 배제한 완전히 독립적인 이사회 산하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 거래를 진행하게 하고, 주주총회에서도 지배주주 및 특수관계인을 모두 뺀 나머지 주주들의 과반수로 결정하면 된다. 2024년 테슬라 주총에서는 논란도 많았지만 일론 머스크 CEO에게 60조원이 넘는 주식매수청구권(스톡옵션)을 지급하는 보상 안건에 대해 머스크 본인과 동생은 지분율 13%가 넘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리 어렵지도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든지 도입할 수 있는 기준이다. 현재 사업구조 개편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SK그룹의 경우 SK이노베이션과 SK E&S가 합병을 추진한다면 최태원 회장 본인과 관계 있는 이사를 배제한 완전히 독립적인 위원회를 구성해서 합병비율 등을 논의하면 되고, 주총에서도 지배주주인 SK(주) 및 특수관계인을 모두 뺀 나머지 주주들의 의견을 따르면 된다.
주주 행동주의는 주주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한 활동임은 물론 자본시장의 효율성을 제고시키는 바람직한 활동이다.
한편 헤지펀드 행동주의는 가치 중립적이다. 상법 개정이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주장은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송옥렬 교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주의는 자본시장에서 주주의 목소리를 회사에 전달하는 유력한 통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한국의 장기 총주주수익률(Total shareholder return)은 선진국 최하위 수준인 연 5%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이나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을 활용한 주주가치 개선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행동주의가 올바른 자본배치 요구를 통해 투자자 보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아시아 거버넌스 전문 평가기관인 Asian Corporate Governance Association(ACGA)도 최근 한국 보고서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더 많은 행동주의 활동을 주문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운명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은 미래 지향적 선택을 하기 바란다.
한경협 등은 더 이상 팩트를 왜곡하지 말고 정당하게 논의에 참여하기 바란다.
차라리 ‘현재의 지배주주가 가장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으니 지배주주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토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한경협 등 의견은 마치 ‘지배주주가 곧 회사’이니 다른 주주는 그저 따르라는 주장으로 들린다.
상장으로 일반주주들로부터 거액의 자본을 조달할 때는 각종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을 상장회사들일텐데, 일반주주의 이익을 더도 아니고 지배주주와 같은 정도로 공평하게 보호할 의무나 책임은 왜 부담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주주 전체에 대한 충실의무는, 모든 주주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다.
그런 원칙을 지킬 의무를 회사의 의사결정 주체인 이사에게 부담시키면 이사의 주주충실의무, 실제 이익을 누리며 이사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배주주에게 부담시키면 지배주주의 다른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되는 것 뿐이다.
한경협 등 8개 단체는 회사들의 조직이다. 회사들의 단체가 현재 지배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거래소와 금융 당국, 경제 부처 등 정부, 그리고 정치권의 답변은 무엇인가?
자본시장 정상화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사실 선택의 문제다.
지금처럼 저평가 상태에서 미국, 일본, 대만 등 다른 자본시장보다 열위에 있는 시장으로 남는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국내 기관과 개인 투자자들은 외국 자본시장에 투자하여 수익을 얻고, 한국 회사의 지배주주들은 계속 자본거래와 새롭게 나올 다양한 방법으로 일반주주들의 희생 하에 지배력을 유지, 강화하면서 원하는 방법으로 경영에 대한 영향력을 승계하면 된다.
정부와 정치권은 그런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 미래를 위한 선택인가?
2024. 6. 25.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 이남우
부회장 천준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