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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 대표] 한국 기업의 목적은 무엇이고, 주인은 누구인가ㅣ중앙일보 - 류영재의 ESG인사이트

사무국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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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회사에서 오랫동안 주식 투자를 했었지만,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한 결사체고, 돈을 댄 주주의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다 회사를 나와 2002년 런던 유학 중, 영국을 대표하는 경영학자 ‘찰스 핸디’의 ‘기업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접하곤 무릎을 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회사법에서는 기업의 주인을 주주라고 말합니다. 종업원은 기업의 소유물이나 비용으로 간주되지요. 과연 그럴까요?” 찰스 핸디가 던진, 이 평이한 듯 난해한 질문에 대해 기업 역사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20세기 초 미국으로 가보자. 포드 자동차를 창업한 헨리 포드의 경영철학은 특별했다. 그는 기업의 목적이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이나 소비자와 같은 이해관계자들의 복리와 후생을 높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경영철학에 따라 그는 종업원에게 높은 임금을 지급했고, 생산성 향상에 따라 소비자에게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했다. 이러한 경영으로 이익이 줄자 주주들의 불만이 커졌다. 1906년 존 닷지와 호레이스 닷지 형제는 포드 자동차에 1만500달러를 투자해 10% 지분을 소유한 주요 주주가 되었다. 이들이 잠자코 있을 리 만무했다.


존 닷지는 포드 이사직을 사임하고 동생과 함께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포드로부터 특별 배당금이 나오지 않자, 포드를 상대로 배당금 지급 소송을 제기했다. 그 유명한 ‘닷지-포드 소송’이다. 1919년 미시간주 대법원 판사는 배당금 지급 명령을 내리며 닷지 형제의 손을 들어 줬다. ‘기업 경영의 목적은 주주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라는 이른바 ‘주주 우선원칙(Shareholder Primacy)’의 법리적 서막이 열렸고, 포드는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주주를 주인의 자리에 앉힌 격이 되었다.

1932년 아돌프 벌리와 가디너 민스는 '현대기업과 사유재산'이라는 명저를 출간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벌리는 이 책에서 ‘주주가치 우선론’을 펼쳤다. 하지만 하버드 법대의 메릭 도드가 벌리를 상대로 ’하버드 법률 리뷰‘에 반론을 제시하면서 기업의 목적을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졌다. ’벌리-도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벌리는 주주 중심적 기업 경영을 강조했지만, 도드는 기업은 주주 이익 제고뿐만 아니라 종업원에게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하고 소비자에게 양질의 제품을 판매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까지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논쟁에서 어느 일방도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드의 승리로 귀결됐다. 벌리는 1954년 출간한 저서에서 “도드의 주장과 정확하게(squarely) 우호적인 방향으로 결론지어졌다”라고 말했다. 벌리의 도드에 대한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그러던 1970년 또다시 주주 최우선주의가 발흥했다. 1970년 9월 뉴욕 타임스 일요판에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기 때문에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주주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또한 1976년 경제학자인 마이클 젠슨과 윌리엄 메클링은 ‘기업 이론’이란 기념비적 논문에서 “주주가 기업의 주인(Principals)이며, 이사와 경영진은 주주의 대리인(Agents)일 뿐이다. 양자 간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는 이른바 ‘대리인 문제’를 제시했다.

이후 ‘주주 최우선주의’, ‘주인-대리인 이론’은 1980~90년대를 관통하며 200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이 프레임은 경영대학원이나 로스쿨을 통해 경영 현장이나 자본시장에 전가의 보도처럼 계승되며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주주자본주의 절정기였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곧 이어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가 기로에 섰다’는 표지 기사를 실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신자본주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전 세계는 패닉에 빠졌다.

이 대사건을 통해 또 다시 자본주의와 기업의 본질을 재조명하는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아나톨 칼레츠키는 ‘자본주의 4.0’에서 시장과 정부가 협력하는 자본주의를 역설했다. 라젠드라 시소디아는 ‘깨어있는 자본주의'에서 SPICE(사회, 협력사, 투자자, 고객, 종업원)를 모두 만족시키는 ‘5윈 경영’을 제시했다. 급기야 2019년 미국 대표기업의 CEO 181명이 참여하는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에서는 47년 만에 기업경영의 목적을 ‘주주’에서 ‘이해관계자 공동의 이익’으로 변경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듯 지난 100여년 서구 자본주의에서는 ‘기업의 목적과 주인’의 문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기업의 목적과 주인은 ‘50년’주기로 시계추처럼 중심 이동했다. 경기 대변동과 산업 패러다임 시프트도 그 진자 운동에 중력을 더했다. 1919년 ‘닷지 v. 포드 판례’ 이후 대공황을 거치며 주주에서 이해관계자로 그 중심추가 이동했고, 1970년 ‘밀턴 프리드먼의 일갈’은 오일쇼크를 거치며 다시 주주를 중심에 놓았다. 또다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격랑을 거치며 2019년 ‘BRT의 이해관계자 선언’까지 50년마다 기업 목적과 주인론은 재정의되었다.

오늘날 서구 ESG 담론은 앞선 자본주의와 기업 목적에 대한 재조명 논쟁과 궤를 같이 하며 기업경영과 자본시장 무대에 등단했다. 즉 주주와 이해관계자 진영 간 길항작용의 결과로서, 양자의 이익 추구가 상호 배타적이 아닌 보완적이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특히 지식 경제하에서 기업의 부가가치는 주주에서 출발한 자본뿐만 아니라, 종업원에서 출발한 지식과 혁신, 재능에서도 창출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앞선 찰스 핸디의 질문도 이 가정에 근거했다. 이뿐인가?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기업의 최우선 목적은 고객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며 소비자에 방점을 찍었다. ‘유한책임(limited liability)’과 같은 특권적 혜택을 부여받은 주식회사 기업에는 사회에 대한 일정한 책무를 부여했다.

이제 국내에서도 서구와 같이 ‘기업의 주인’ 문제를 놓고 사회적 공론화를 시작할 때가 됐다. 기업 주인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 위에서 기업경영의 목적도 명확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런 의제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상장사 오너 일가의 평균 직접 지분율은 3.9%인데, 이들을 주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머지 96.1%를 보유한 여타 주주들은 무엇인가? 이들도 주인으로서 대우 받아야 하지 않는가? 회사에 시간과 지적 자산을 제공한 종업원도 주인인가? 종업원 중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어떤 차별점이 있는가? 주주는 회사 실적 악화에 따라 고통 분담하지만, 재무 상황과 무관하게 고용과 임금을 보장 받는 정규직 종업원들은 과연 주인인가? 클릭 한번으로 주주의 신분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외부 주주들도 주인인가? 이들 모두는 주인에게 요구되는 권리와 책무를 부끄럼 없이 다하고 있는가?

만일 국내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이미 경험했었던 근원적 질문들에 대해 건너뛴 채 ESG경영만 앞세운다면, 그것은 허울 뿐인 ESG경영이 될 것이다. 목적과 행위가 배치된 맹목적 ESG경영은 결국 길을 잃을 뿐더러 결코 멀리 나갈 수도 없다. 이는 뿌리 없는 나무와도 같아 일시적으로 나무의 잎사귀가 무성해 보이지만 곧 잎사귀는 시들고 줄기도 마를 것이다. 당연히 열매는 기대난망이다. 이제 우리도 서구 이론의 기계적 수입과 암기가 아닌, 한국 토종의 논쟁을 거친 이론과 실제를 정립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역사, 문화, 제도적 맥락을 고려하여 학계, 기업계, 투자업계 등이 다음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한국 기업의 진정한 목적과 주인은 누구인가?”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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